로저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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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저 헌트는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로, 주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1958년 리버풀 FC에 입단하여 1969년 볼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하기 전까지 492경기에서 285골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1961-62 시즌에는 41골을 기록하며 팀의 2부 리그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 또한,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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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생화학자 팀 헌트는 세포 주기 조절에 중요한 사이클린을 발견한 공로로 200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으나, 2015년 성차별적 발언 논란으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명예 교수직을 사임했다.
로저 헌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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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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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저 헌트 |
출생일 | 1938년 7월 20일 |
출생지 | 랭커셔주 글레이즈베리, 잉글랜드 |
사망일 | 2021년 9월 27일 |
사망지 | 잉글랜드 |
신장 | 알 수 없음 |
포지션 | 공격수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크로프트 유소년 클럽 |
아마추어 클럽 | 스톡턴 히스, 데바이즈 타운 |
선수 경력 | 1958–1969: 리버풀 (404경기, 244골) 1969–1972: 볼턴 원더러스 (76경기, 24골) 1971: → 헬레닉 (임대) (6경기, 4골) |
총 출장 및 득점 | 486경기, 272골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잉글랜드 (1962–1969, 34경기, 18골) |
훈장 | |
훈장 | MBE |
메달 수상 내역 | |
메달 | 남자 축구 1966 잉글랜드 FIFA 월드컵 우승 |
2. 클럽 경력
로저 헌트는 선수 경력의 황금기를 리버풀 FC에서 보냈다. 그는 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1부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 등 주요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32] 꾸준한 득점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리버풀의 주포로 활약했으며,[33] 구단 역사상 중요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후반 팀 개편 과정에서 볼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했으며, 이후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1972년에 은퇴했다.[33]
2. 1. 초기 경력
글래즈베리(Glazebury)에서 태어난 헌트는 유년 시절에 크로프트 유스 클럽(Croft Youth Club), 스톡턴 히스, 데바이시스 타운에서 뛰었다.[2]2. 2. 리버풀 FC

1958년 7월,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필 테일러에 의해 스톡턴 히스에서 영입되었다.[3] 1959년 9월 9일, 안필드에서 열린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와의 세컨드 디비전 경기에서 리버풀 데뷔전을 치렀고, 후반 64분에 팀의 두 번째 골을 기록하며 2-0 승리에 기여했다. 이는 그의 리버풀 통산 286골 중 첫 번째 골이었으며, 이 중 244골은 리그에서 기록한 것으로 이는 오랫동안 클럽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4][33]
빌 샹클리가 필 테일러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후, 샹클리와 코칭 스태프는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을 단행하여 24명의 선수를 방출했지만, 헌트는 팀에 남아 1960년대 리버풀 성공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샹클리 체제 하에서 헌트는 주전 공격수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특히 파트너 이안 세인트 존과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며 상대 수비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31][33] 그는 1959-60 시즌부터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꾸준함을 보였다.[33]
리버풀은 1956년부터 5년 연속으로 2부 리그 3위 또는 4위에 머물렀으나, 1961-62 시즌 마침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2] 이 시즌에 헌트는 리그 42경기 중 41경기에 출전하여 41골을 터뜨리는 경이로운 활약을 펼쳤고,[33] 리즈 유나이티드, 월솔, 스완지 타운, 전 소속팀 버리,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5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1부 리그에서도 그의 득점력은 여전했다. 리버풀이 1963-64 시즌과 1965-66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2] 이 두 시즌에 각각 41경기 31골, 37경기 29골을 기록하며 8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1964년 8월 22일, 아스널과의 홈 경기 개막전에서 경기 시작 11분 만에 골을 넣었는데, 이 골은 BBC의 축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매치 오브 더 데이''에서 방영된 역사상 첫 번째 골이기도 했다.[6]
1965년에는 리버풀의 구단 역사상 첫 FA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헌트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스톡포트 카운티, 볼턴 원더러스, 레스터 시티, 첼시를 차례로 꺾는 과정에서 4골을 기록했고, 웸블리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는 0-0으로 맞선 연장 전반 3분(93분)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이후 파트너 이안 세인트 존의 결승골에 힘입어 리버풀은 2-1로 승리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2] 이듬해인 1966년에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팀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지만, 연장 접전 끝에 1-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5]
1967년 11월 7일,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서독의 TSV 1860 뮌헨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리버풀 소속 통산 242번째 골을 기록,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로 올라섰다.[7] 그는 리버풀 역사상 가장 적은 경기(152경기) 만에 100골을 달성한 기록도 보유했으나, 이 기록은 2021년 9월 모하메드 살라가 151경기 만에 100골을 넣으며 경신했다.[8]
1960년대 후반, 리버풀은 레이 클레멘스, 엠린 휴즈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헌트 역시 점차 출전 기회를 잃게 되었다. 결국 1969년,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하며 리버풀을 떠났다. 리버풀에서 그는 통산 492경기에 출전하여 286골(리그 244골)을 기록했다.[33][4] 그의 통산 득점 기록은 이안 러시가 1992년에 경신하기 전까지 23년간 구단 역대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었다.[7] 헌트는 볼턴에서 활약하다 1972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33]
2. 3. 이후 경력
1960년대 후반 리버풀은 주력 선수들의 고령화로 세대교체를 시작했다. 레이 클레멘스나 엠린 휴즈와 같은 젊은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헌트 역시 출전 기회를 잃게 되었다. 결국 1969년 12월 볼턴 원더러스와 계약하며 팀을 옮겼다.[3]1971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내셔널 풋볼 리그에 소속된 헬레닉 FC로 임대되었다.[9] 그는 1972년에 현역에서 은퇴했으며,[3][33] 같은 해 4월 리버풀에서 그의 기념 경기가 열렸는데, 56,000명이 참석했다.[3]
3. 국가대표 경력
헌트는 1962년 4월 4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그는 2부 리그 선수였음에도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헌트는 데뷔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잉글랜드의 3-1 승리에 기여했다.[10] 그는 총 34번의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칠레에서 열린 1962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11][31]
잉글랜드가 개최한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알프 램지 감독에 의해 22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리버풀 동료였던 이안 캘러건, 제리 번도 함께 발탁되었다.[12] 헌트는 이 대회에서 3명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처음에는 토트넘 홋스퍼의 지미 그리브스와 투톱을 이루었으나, 그리브스가 다리 부상으로 빠진 후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제프 허스트와 호흡을 맞췄다.[13][14][31] 그는 대회 6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2골, 멕시코를 상대로 1골을 넣어 총 3골을 기록했다. 잉글랜드는 결승전에서 서독을 연장전 끝에 4-2로 꺾고 쥘 리메 컵을 들어 올렸으며, 헌트는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15][16] 감독이 알프 램지로 바뀐 후에도 그는 지미 그리브스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주전 자리를 지키며 꾸준히 활약했다.[31]
4. 은퇴 이후
선수 은퇴 후 그는 형제 피터와 함께 가업인 운송 회사 '헌트 형제사'(Hunt Brothers)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이 회사는 1929년 리처드와 해리 헌트가 처음 설립한 것으로, 로저 헌트는 3대째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3][17]
2000년에는 1966년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MBE(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받았다.[3] 비록 정식 기사 작위(Knighthood)는 아니었지만, 리버풀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애정을 담아 "경(Sir)" 로저 헌트로 불렸다.[18]
2006년에는 잉글랜드 축구계에서의 업적을 기려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9] 같은 해, 리버풀 FC 공식 팬 투표인 '콥을 뒤흔든 100명의 선수(100 Players Who Shook The Kop)'에서 1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20] 2016년에는 워링턴 자치구로부터 명예 자유 시민(Freedom of the Borough)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21]
개인적인 삶으로는 1959년 패트리샤 오브라이언(Patricia O'Brien)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22] 이후 두 번째 부인인 로완 그린(Rowan Green)과 함께 워링턴 인근에서 거주했다.[23]
헌트는 2021년 9월 27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4] 그의 장례식은 같은 해 10월 14일 리버풀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25]
5.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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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클럽
1958년, 필 테일러 감독에 의해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이후 감독이 빌 샹클리로 교체되면서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다. 오랜 기간 공격 파트너였던 이언 세인트 존과 함께 수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며[31] 상대 수비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평가받았다[33]。1959-60 시즌부터 10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인 스트라이커였다. 특히 1961-62 시즌에는 41경기에 출전하여 41골을 넣는 뛰어난 활약으로[33], 리버풀의 2부 리그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 1부 리그에서도 꾸준히 득점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32]。하지만 1960년대 후반, 팀 내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로 세대교체가 진행되었고, 레이 클레멘스나 엠린 휴즈 같은 젊은 선수들이 부상하면서 헌트 역시 점차 출전 기회를 잃게 되었다. 결국 1969년 볼턴 원더러스 FC로 팀을 옮겼다. 리버풀에서는 통산 492경기에 출전하여 285골을 기록했다[33]。1972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리버풀'''[26]
- 풋볼 리그 1부: 1963-64, 1965-66
- 풋볼 리그 2부: 1961-62
- FA컵: 1964-65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잉글랜드'''[28]
'''개인'''
- 잉글랜드 2부 디비전 득점왕: 1961-62
- 잉글랜드 1부 디비전 득점왕: 1965-66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6년 헌액
- 리버풀 FC 명예의 전당: 헌액
5. 2. 국가대표
1962년,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월터 윈터보텀에게 발탁되어 그해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대표팀에서는 제프 허스트 등과 주전 경쟁을 벌였고, 1962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후 알프 램지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발탁되었으며,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지미 그리브스를 대신하여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31] 잉글랜드의 우승에 기여했다.[28][29]5. 3. 개인
- 풋볼 리그 2부 디비전 득점왕: 1961-62
-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득점왕: 1965-66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6년 헌액
- 리버풀 FC 명예의 전당: 헌액
6. 서훈
2000년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했다.[34][35]
7. 통계
빌 샹클리 감독 부임 후 리버풀 FC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 잡았으며, 이언 세인트 존과 강력한 공격 듀오를 형성했다.[31][33] 1959-60 시즌부터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특히 1961-62 시즌에는 41경기에서 41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으로[33] 팀의 세컨드 디비전 우승과 퍼스트 디비전 승격을 이끌었다. 퍼스트 디비전에서도 꾸준한 득점력을 선보이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32] 리버풀 소속으로 통산 492경기에 출전하여 285골을 기록했다.[33] 1960년대 후반 팀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점차 출전 기회를 잃고 1969년 볼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했으며, 1972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7. 1. 클럽 기록
그는 1958년 7월 리버풀의 감독 필 테일러에 의해 스톡턴 히스에서 영입되었다.[3] 헌트는 1959년 9월 9일 세컨드 디비전 경기에서 안필드에서 스컨소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클럽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했다. 헌트는 64분에 득점하여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골은 그가 리버풀에서 기록한 수많은 골 중 첫 번째였으며, 그는 클럽에서 리그 244골을 포함해 총 286골을 기록했는데, 리그 득점은 당시 클럽 기록이었다.[4]빌 샹클리가 테일러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한 후, 샹클리와 그의 코칭 스태프 '부트 룸'은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을 단행하여 24명의 선수를 정리했다. 그러나 헌트는 팀에 잔류했고, 1960년대 리버풀 성공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리버풀은 1956년부터 1961년까지 5년 연속으로 3위 또는 4위를 기록하며 아쉽게 승격 기회를 놓쳤으나, 마침내 1962년에 1부 리그로 승격했다.[2] 헌트는 1961-1962 시즌에 42번의 리그 경기 중 41경기에 출전하여 41골을 기록하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그의 득점력은 리버풀이 레이턴 오리엔트를 8점 차로 제치고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 시즌 동안 리즈 유나이티드, 월솔, 스완지 타운, 전 소속팀인 버리,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5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리버풀은 1963-64 시즌과 1965-66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2] 헌트는 이 두 시즌에도 각각 41경기 31골, 37경기 29골을 기록하며 8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 자리를 지켰다. 1964년 8월 22일, 헌트는 아스널과의 홈 경기에서 경기 시작 11분 만에 골을 넣어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 골은 BBC의 대표 축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매치 오브 더 데이''에서 방영된 첫 번째 골이기도 했다.[6]
두 번의 리그 우승 사이인 1965년, 헌트는 리버풀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버풀은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스톡포트 카운티, 볼턴 원더러스, 레스터 시티, 첼시를 차례로 꺾고 1950년 이후 처음으로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헌트는 이 과정에서 4골을 기록했다. 결승전은 정규 시간 90분 동안 득점 없이 끝났으나, 연장전에서 헌트가 93분에 선제골을 넣었고, 그의 공격 파트너 이안 세인트 존이 결승골을 터뜨려 리버풀은 웸블리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2-1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2] 또한 그는 다음 해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의 유일한 골을 넣었지만, 팀은 연장전 끝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1-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5]
1967년 11월 7일, 헌트는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서독의 TSV 1860 뮌헨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리버풀 소속으로 242번째 골을 달성,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로 등극했다. 그가 1969년에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할 때까지 리버풀 소속으로 총 286골을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이안 러시가 23년 후에 깨기 전까지 유지되었다.[7] 그는 또한 리버풀 역사상 가장 적은 경기(152경기) 만에 100골을 기록한 선수였으나, 이 기록은 2021년 9월 모하메드 살라가 한 경기 더 적게 치르고 100골을 달성하며 경신되었다.[8]
오랫동안 공격 파트너를 맡았던 이안 세인트 존과 함께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냈으며[31], 상대 수비수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33]。1959-60 시즌부터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친 스트라이커였다. 특히 1961-62 시즌에는 41경기에서 41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으로[33] 클럽의 세컨드 디비전 우승과 퍼스트 디비전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 퍼스트 디비전에서도 꾸준히 득점을 올리며 클럽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32]。그러나 1960년대 후반, 주력 선수들의 노쇠화로 팀에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레이 클레멘스나 엠린 휴즈와 같은 젊은 선수들이 부상했고, 헌트 역시 점차 출전 기회를 잃어 1969년 볼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했다. 리버풀에서는 통산 492경기에 출전하여 285골을 기록했다[33]。그는 1972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 컵 | 유럽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리버풀 | 1959-60 | 세컨드 디비전 | 36 | 21 | 2 | 2 | 0 | 0 | – | – | 38 | 23 | ||
1960-61 | 세컨드 디비전 | 32 | 15 | 1 | 1 | 3 | 3 | – | – | 36 | 19 | |||
1961-62 | 세컨드 디비전 | 41 | 41 | 5 | 1 | 0 | 0 | – | – | 46 | 42 | |||
1962-63 | 퍼스트 디비전 | 42 | 24 | 6 | 2 | 0 | 0 | – | – | 48 | 26 | |||
1963-64 | 퍼스트 디비전 | 41 | 31 | 5 | 2 | 0 | 0 | – | – | 46 | 33 | |||
1964-65 | 퍼스트 디비전 | 40 | 25 | 8 | 5 | 0 | 0 | 9 | 7 | 1 | 0 | 58 | 37 | |
1965-66 | 퍼스트 디비전 | 37 | 29 | 1 | 1 | 0 | 0 | 7 | 2 | 1 | 0 | 46 | 32 | |
1966-67 | 퍼스트 디비전 | 39 | 14 | 3 | 1 | 0 | 0 | 5 | 3 | 1 | 1 | 48 | 19 | |
1967-68 | 퍼스트 디비전 | 40 | 25 | 9 | 2 | 2 | 0 | 6 | 3 | – | 57 | 30 | ||
1968-69 | 퍼스트 디비전 | 38 | 13 | 4 | 1 | 3 | 2 | 2 | 1 | – | 47 | 17 | ||
1969-70 | 퍼스트 디비전 | 18 | 6 | 0 | 0 | 2 | 0 | 2 | 1 | – | 22 | 7 | ||
합계 | 404 | 244 | 44 | 18 | 10 | 5 | 31 | 17 | 3 | 1 | 492 | 285 | ||
볼턴 원더러스 | 1969-70 | 세컨드 디비전 | 17 | 5 | 0 | 0 | 0 | 0 | – | – | 17 | 5 | ||
1970-71 | 세컨드 디비전 | 24 | 8 | 0 | 0 | 0 | 0 | – | – | 24 | 8 | |||
1971-72 | 서드 디비전 | 35 | 11 | 0 | 0 | 0 | 0 | – | – | 35 | 11 | |||
합계 | 76 | 24 | 0 | 0 | 0 | 0 | 0 | 0 | 0 | 0 | 76 | 24 | ||
선수 경력 합계 | 480 | 268 | 44 | 18 | 10 | 5 | 31 | 17 | 3 | 1 | 568 | 309 |
7. 2. 국가대표 기록
헌트는 1962년 4월 4일 웸블리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당시 2부 리그 선수였음에도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부름을 받았으며, 데뷔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10] 그는 1962년 FIFA 월드컵 칠레 대회 잉글랜드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11]잉글랜드가 개최한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알프 램지 감독에 의해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리버풀 동료였던 이안 캘러건, 제리 번도 함께 발탁되었다.[12] 헌트는 이 대회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다. 초기에는 토트넘 홋스퍼의 지미 그리브스와 투톱을 이루었으나, 그리브스가 다리 부상으로 이탈한 후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제프 허스트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다.[13][14] 그는 대회 6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멕시코를 상대로 1골, 프랑스를 상대로 2골을 기록하는 등 총 3골을 넣으며 잉글랜드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잉글랜드는 결승전에서 서독을 연장전 끝에 4-2로 꺾고 쥘 리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15][16]
헌트는 월터 윈터보텀 감독 시절 발탁된 이후 알프 램지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31], 총 34번의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
7. 2. 1.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No. | 날짜 | 장소 | 상대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62년 4월 4일 | 런던, 잉글랜드 | 오스트리아 | 3–0 | 3–1 | 친선 경기 |
2. | 1963년 6월 2일 | 라이프치히, 동독 | 동독 | 1–1 | 2–1 | |
3. | 1964년 5월 27일 | 뉴욕, 미국 | 미국 | 1–0 | 10–0 | |
4. | 3–0 | |||||
5. | 6–0 | |||||
6. | 7–0 | |||||
7. | 1964년 6월 4일 | 상파울루, 브라질 | 포르투갈 | 1–1 | 1–1 | 타사 다스 나세스 |
8. | 1965년 12월 8일 | 마드리드, 스페인 | 스페인 | 2–0 | 2–0 | 친선 경기 |
9. | 1966년 4월 2일 |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 | 2–0 | 4–3 | 1965-66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10. | 3–1 | |||||
11. | 1966년 6월 26일 | 헬싱키, 핀란드 | 핀란드 | 2–0 | 3–0 | 친선 경기 |
12. | 1966년 7월 5일 | 호주프, 폴란드 | 폴란드 | 1–0 | 1–0 | |
13. | 1966년 7월 16일 | 런던, 잉글랜드 | 멕시코 | 2–0 | 2–0 | 1966년 FIFA 월드컵 |
14. | 1966년 7월 20일 | 프랑스 | 1–0 | 2–0 | ||
15. | 2–0 | |||||
16. | 1966년 10월 22일 | 벨파스트, 북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 1–0 | 2–0 | 1966–67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17. | 1967년 5월 24일 | 런던, 잉글랜드 | 스페인 | 2–0 | 2–0 | 친선 경기 |
18. | 1968년 5월 22일 | 스웨덴 | 3–0 | 3–1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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